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교회 일치 운동 (문단 편집) === 가톨릭과 SSPX ===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주재 교황대사였으며 프랑스 튈의 대교구장이었던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가 중심이 되어 발족된 [[성 비오 10세회]](이하 SSPX)는 [[전통 가톨릭|가톨릭 전통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가톨릭 전통주의자들이 1970년에 회를 설립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바로 1969년에 교황 [[바오로 6세]]가 승인한 로마 미사 경본(Missale Romanum) 때문이었다. 새로운 [[미사]] 경본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전례개혁의 정신을 담고 있었으며 예전 [[전통 미사]]와 상당히 많이 달라졌다. 이제 모든 가톨릭 교인들은 [[라틴어]]뿐만 아니라 자국어로도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고, 벽에 붙은 제대를 바라보며 진행되던 미사는 이제 사제와 평신도들이 식탁과 같은 제대를 마주보고 둘러 서서 드리는 미사로 급격하게 바뀌게 되었다. 또한 미사 경문과 기타 전례문의 많은 요소가 삭제되거나 새로이 추가되었고 전례력도 대대적으로 변경됐다. 또한 개신교의 영향을 받아 성령쇄신운동도 도입되었다. 이러한 가톨릭교회의 급진적 변화는 가톨릭 전통주의자들로 하여금 전통의 의미가 퇴색되었다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은 1970년 대주교의 친구이기도 한 [[스위스]] 프리부르 [[교구]]장 [[주교]] 샤리에르 주교와 접촉하여 스위스의 에콘에 신학교 설립 승인을 요청했고, 이와 더불어 [[성 비오 10세회]]의 설립을 신청하여 인준받았다. 보통 가톨릭 교회 내의 신앙 단체는 몇 단계의 심사와 활동 기간을 거친 뒤에 정식 단체로 인준을 받게 되었으므로 처음 몇 년간은 교회의 감독 하에서 보수 성향 신앙 단체로서 활동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 추진에 열심인 프랑스 성직자들은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 및 그를 지지하는 사제·신학생들의 활동에 부정적이었고 그들을 [[트리엔트 미사]]와 옛 해석에 집착하는 자들이라고 비판했다. 이 모든 상황은 1974년 스위스 에콘의 성 비오 10세 신학교를 교황청에서 파견한 2명의 벨기에인 추기경이 시찰하게 되면서 급격하게 바뀌게 된다. 르페브르 대주교는 이들의 신학이 너무나도 급진적이고 자유주의적이며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에 가져다 준 해악의 산물이라는 논지의 선언을 했다. [[1974년 11월 21일 선언]]으로 불리워지는 이 선언으로 인해 교황청은 큰 충격을 받았고, 샤리에르 주교의 후임 프리부르 교구장 피에르 마미 주교는 SSPX의 인준을 철회하겠다는 의향을 교황청에 전했으며, 르페브르 [[대주교]]는 3명의 추기경으로 구성된 위원회에 소환되었다. 결국 SSPX의 인준은 1975년에 철회되었고, 르페브르는 신학생들과 자신과 함께 뜻을 같이하는 사제·평신도들과 항의하는 차원에서 로마를 방문했다. 그러나 교황청 사법기관은 르페브르의 항소를 기각했고 공의회에 따른 결정 사항을 준수하라고 명령했다. 심지어 1976년에 교황 [[바오로 6세]]는 공개적으로 르페브르 대주교를 비난했는데, [[교황]]이 특정 가톨릭 성직자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것은 근 200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르페브르 대주교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모든 상황은 SSPX로 하여금 당장 교황청을 설득하지 못하더라도 단호하게 하던 일을 계속해야겠다고 결심하게 했다. 이들은 [[트리엔트 미사]]와 공의회 이전의 모든 로마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지키는 길을 선택했다. 르페브르 대주교는 1976년 12명을 사제로 [[성품성사|서품]]했다. 이로 인해 르페브르 대주교는 성무 집행 정지 처분을 받아 합법적으로 성무를 집행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대주교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러 사업을 진행해나갔다. 문제는 그의 나이가 많아서 그가 죽게 되면 SSPX는 주교 없이 활동하는 빈약한 단체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들에게 주교 서임을 위한 좋은 구실이 만들어졌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3년 사도 헌장을 발표하여 기존의 교회 법전을 수정하였다. 또한 정교회와 여러 개신교 교파와 함께 다양한 교회 일치 운동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였는다. 그 중 가장 대표적으로 다양한 기독교 교파 지도자 뿐 아니라 힌두교, 시크교, 불교, 유대교, 이슬람교, 아프리카와 북미의 정령 신앙, 신토, 조로아스터교, 바하이교 지도자까지 함께 모여 1986년 10월 27일 이탈리아의 아시시에서 세계 평화를 위한 금식 기도회가 있었다. SSPX는 교황의 이같은 조치에 [[종교다원주의]]라면서 크게 격앙되었고, 이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되어 르페브르 대주교가 1988년에 4명의 사제를 주교로 전격 임명하게 만들었다. 이는 사도좌로부터의 자동 [[파문]] 조치에 해당하는 행위였다. [[성 비오 10세회]] 활동은 로마 교황청의 골칫거리였다. 로마 교황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과 이에 따른 결정 사항을 도로 물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그것이 사회의 요구에 대한 적절한 응답이었다고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교회 내 많은 전통주의자들이 그 변화에 부정적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요컨대 SSPX 존재는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적절한 위치를 잡지 못하던 교황청의 심기를 건드렸다. 성 비오 10세회는 공공연히 자유주의와 현대주의를 공박했으며 교황의 교회 일치 운동과 신학의 진보적 변화를 수용 거부했다. 또한 이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이 지나치게 진보적이어서 가톨릭교회의 기존 전통을 크게 훼손되었다면서 전례 의미가 혁파되고 사제의 기능이 축소되었으며 이로 인해 가톨릭 교회가 개신교가 가진 오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성 비오 10세회와의 화해를 위해 가장 노력한 사람은 [[요한 바오로 2세]] 재위 시절에 신앙교리성 장관이었던 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였다. [[추기경]] 시절 신앙교리성 장관으로서 성 비오 10세회와의 협상을 맡기도 했던 그는 자의 교서를 내려 모든 가톨릭 사제의 [[트리엔트 미사]] 집전을 자유롭게 전면 허용한다는 조치[* 이 조치는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취소되었다.]를 취해 화해의 길을 터놓았다. 그는 르페브르 대주교에 의해 서품된 4명의 주교에 대한 자동 파문을 철회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실제로 이 조치 후 많은 접촉이 잇따랐다. 그러나 현재 대화의 지속에도 불구하고 현재 SSPX는 인준받지 못한 상태로 남아있다. 교황청의 성 비오 10세회에 대한 규정은 하느님의 교회 위원회 의장이었던 귀도 포조 대주교가 언급한 바 있듯이 '[[가톨릭교회]]의 일부이지만 교회법상 불법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